종묘는 사직단과 함께 조선의 정신적 근간이다. 그래서 신하들은 왕에게 "종묘사직을 보존하라" 그렇게 요구했다. 태조 이성계는 조선을 세우고 3년이 지난 1394년 10월에 한양으로 천도했다. 그리고 그해 12월 4일 종묘 건축을 시작했다. 그리고 이듬해 9월 29일 정전 7간間이 처음으로 지어졌다. 그 외 정전 영역의 정문인 신문神門 3간, 동문 3간, 서문 1간 그리고 신문 동쪽에 5간의 공신당功臣堂이 지어졌다.
공신당은 역대 왕들이 재위했을 때 가장 공功이 큰 신하臣下들을 모시는 사당이다. 조선은 군인 이성계가 지식인 그룹인 신진사대부와 힘을 합쳐 세운 나라다. 이성계 입장에서는 자신이 왕이 되는데 결정적인 도움을 준 신진사대부를 대접해야 했다. 종묘라는 시설이 있는 아시아 국가 중 공신당을 세운 나라는 조선이 유일했다.
도시를 전공한 사람이 종묘를 언급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얘기는 《주례고공기周禮考工記》에 나오는 "匠人管國, 方九里, 旁三門, 國中九經九緯, 經徐九軌, 左祖右社, 面朝後市"다. 특히, "左廟右社, 面朝後市"는 국가 중요 시설인 종묘(좌측), 사직(우측), 행정관청(전면), 시장(후면)의 위치를 정하는 가이드라인Guideline이었다. 이 내용은 중국 역대 왕조 뿐 만 아니라 우리나라 역대 왕조 도성건설의 기본이 됐다. 한양도 예외는 아니었지만 그대로 적용하지는 않고 풍수지리 사상과 섞었다. 그래서 한양의 시장은 후면(북쪽)이 아닌 종로(좌측)를 따라 만들어졌고 동대문과 남대문에서 커졌다. 하지만 종묘와 사직의 위치는 정궁인 경복궁을 기준으로 서쪽과 동쪽에 배치됐다.
한양 도성 안에서 종묘의 위치를 보면 북촌과 인사동 일대를 가운데 두고 경복궁과 대칭이다. 북악산-(청와대)-경복궁-육조거리(광화문광장)가 하나의 흐름을 이룬다면 그 반대편에 북악산-창덕궁과 창경궁-종묘가 또 하나의 흐름을 만든다. 태종(1405년) 때 조성된 창덕궁은 1412년 돈화문이 건립되면서 궁궐의 면모를 갖췄다. 동쪽에 인접한 창경궁은 1418년 왕위에 오른 세종이 태종을 모시기 위해 지었다. 흔히 조선의 정궁을 경복궁이라 하지만 태종 이후 왕들은 창덕궁에 머물렀다. 심지어 임진왜란 때 대부분 전소된 한양내 궁궐들 중 경복궁은 270년이 지난 1867년 흥선대원군의 결정으로 중건됐지만 창덕궁은 1610년 광해군 때 중건이 끝났다. 창덕궁은 조선시대 실질적인 정궁이었다.
창덕궁에 왕이 머물렀다는 점을 감안하면 종묘는 조선시대 왕들에게 아주 가까운 곳이었다. 심지어 당시에는 현재 두 궁과 종묘를 나누는 율곡로 조차 없었으니 창덕궁과 창경궁(위 사진) 그리고 종묘는 하나의 영역이었다. 실제 이 영역을 '동궐'이라 불렀다. 그럼 서궐은? 현재 경희궁과 덕수궁을 함께 일컫는 경덕궁 영역이다. 염복규는 《서울은 어떻게 계획되었는가, 살림》에서 "서궐은 민인들의 공간과 직접적으로 연결되어 있었고 동궐은 민인들의 생활공간과 분리되어 고고하게 고립되어 있는 공간"이라고 구분했다.
창덕궁에 머물렀던 왕의 입장에서 보면 종묘의 주출입구인 외대문外大門으로 들어가는 길은 가장 우회하는 경로다. 그래서 난 '종묘전도宗廟全圖(위 이미지, 1697년 편찬된 《종묘의궤》에 수록)'를 봤을 때 외대문 만큼 외서문(外西門 서쪽)과 북신문(北神門 북쪽)에 관심이 갔다. 종묘전도는 건물의 향을 반영하지 않고 있다. 일종의 다이어그램Diagram인데 추측을 해보면 외서문은 영녕전永寧殿 서문 서쪽에 있었으니 창덕궁으로, 북신문은 신주神廚(전사청) 북쪽에 있었으니 창경궁으로 연결돼 있었을 것 같다. 물론, 종묘에서 공식적인 행사가 있다면 창덕궁에 머물렀던 왕이 외대문으로 돌아 종묘에 들어갔겠지만 평소까지 그랬을까라는 상상을 해본다. 내가 그랬듯, 현재 우리가 그렇듯 조용히 사색하고 싶을 때, 선대들에게 비록 답을 얻지는 못해도 질문을 던지고 싶을 때, 적요함 속에 빠지고 싶을 때 왕은 외서문을 통해 종묘를 찾았을 것 같다.
양쪽에 길게 늘어진 돌담을 감안하면 종묘의 정문인 외대문은 간소해 보인다(위 사진). 원래 외대문 가운데에는 계단이 있었다고 한다. 그렇다면 지금 보다 더 올려다 봐야했겠지만 그렇다고 근엄해 보이지는 않았을 것 같다. 속俗의 세계와 구분하려는 최소한의 제스처Gesture라 생각된다. 이 계단은 일제시대 도로를 조성하면서 땅에 묻혔다. 그래서 지금은 전면에 있는 종묘광장공원과 단차가 없다.
외대문을 들어서면 넓적한 돌을 깐 삼도三道가 북쪽으로 뻗어 있다. 길이는 길지 않지만 양쪽에 나무가 울창해서 삼도의 끝이 가늠되지 않는다(위 사진). 삼도를 가만보면 가운데 돌이 양쪽 보다 올라와 있다. 이는 가운데 돌길이 양쪽 돌길과 다르다는 것의 드러냄이다. 가운데 돌길은 신향로神香路, 즉 신을 위한 길이다. 그리고 살짝 낮은 양쪽 길은 인간이 다니는 길로 그 중에서도 동측은 어로御路, 즉 임금의 길이고 서측은 세자로世子路다.
앞서 본 종묘전도에는 삼도를 포함한 길이 그려져 있지 않다. 외대문 위쪽에 구불구불한 선은 물길이다. 반면, 1741년(영조17)에 편찬된 《종묘의궤속록》에 실려 있는 '종묘전도(위 이미지)'에는 정전 인근의 길이 그려져 있다. 종묘전도에 따르면 삼도는 신문으로 바로 연결되지 않고 45도 꺾여있다. 현재 삼도는 외대문에서 140m를 들어온 뒤 동쪽으로 90도 꺾여 재궁齋宮으로 이어진다. 재궁은 제사를 지내기 전 국왕이 목욕재계를 하고 의복을 정제하던 곳이다.
삼도가 재궁 방향으로 꺾이기 전에 연못이 하나 있다. 연못 가운데에는 향나무가 심어진 타원형의 섬이 있고 동쪽으로는 망묘루와 향대청이 있다. 망묘루望廟樓는 임금이 제사를 지낼 때 정전을 바라보며 선왕이든 국운이든 뭔가를 생각하는 곳이다. 건물 이름에 '루'를 쓴 이유는 가장 서쪽에 있는 1간이 누마루로 돼 있기 때문이다(위 사진). 향대청香大廳은 제사에 쓰이는 향과 축문, 예물 등을 보관하고 제사를 맡은 관원들이 대기하던 곳이다.
ㄱ자 배치를 이루는 망묘루와 향대청 안쪽에 1간 크기의 공민왕신당이 있다. 조선의 국가사당에 고려의 왕을 모시는 사당이 있다는 것이 의아하다. 그 연유에 대해 정확히 알려진 바는 없지만 신화와 같은 이야기가 전해진다. 종묘를 지을 때 북쪽으로부터 불어온 회오리바람에 실려 공민왕의 영정이 묘정에 떨어졌다는 내용이다. 설령 이 이야기가 사실이라면 조선 초 망한 고려를 그리워한 누군가가 타이밍을 잘 맞춰 날려보낸 것이 아닐까? 종묘 창건시에 건립됐다는 공민왕신당은 그러나 두 종묘전도에는 표시돼 있지 않다.
삼도는 정전의 정문인 신문으로 향한다. 하지만 방문객은 신도, 왕도 그렇다고 왕세자도 아니기에 동문을 통해 들어가 서문으로 나온다. 동문 안으로 들어서면 정전이 나온다(위 사진). 그리고 정전과 그 앞 월대月臺를 마주하는 순간 짧은 탄식과 함께 침묵할 수 밖에 없었다. 정전 영역에 들어서자 문화재해설사의 설명이 빨라졌다. 난 월대에 말이 놓일 자리는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해설사의 말과 가장 먼 자리로 갔다. 그곳은 월대의 모서리 끝이었다. 승효상은 월대를 "산 자와 죽은 자가 본원의 위치를 떠나 서로 만나는 듯한 중간 영역"이라고 설명했다. 뭐가 됐든 난 그 자리가 가장 편했다.
월대의 크기는 동서 109m, 남북 69m다. 월대를 채우고 있는 건 한가운데 신로神路와 불규칙한 박석 뿐. 우연인지 신로가 수렴되는 가운데 판문板門만 열려 있었다. 분명 그 열린 문으로 들어가면 정전의 안쪽일 테지만 그 장면에서 그 판문은 정전의 바깥, 내가 알지 못하는 다음 세계로 향하는 통로 같았다. 잠시 후 다시 우연히 정전의 서쪽 간들의 판문이 모두 열렸다(위 사진). 반은 열리고 반은 닫혀 있는 정전을 보며 이곳에서 얻고자 했던 답을 너는 얻었느냐 라는 질문을 받는 듯했다. 그 질문이 버거워 눈을 돌리자 박석들이 보였다. 박석을 두고 승효상은 "땅에 새긴 신의 지문" 같다고 했다.
이번에는 월대의 반대편으로 갔다. 가이드의 설명은 계속됐지만 들리지 않는 그 웅성거림이 왠지 아득하게 느껴졌다. 월대에서도 저쪽의 세계와 이쪽의 세계는 같은 영역처럼 보이지 않았다. 월대 끝에서 정전을 바라봤다. 신Scene을 채우는 건 수평선이었다. 정전의 용마루, 처마선, 기단부, 월대 그리고 정전 뒤의 녹음까지 모두 수평이었다. 현재 우리가 사는 도시는 고층건물로 가득하다. 그래서 매일 바라보는 장면은 수평 보다 수직이다. 그러니 종묘에서 보이는 수평선은 우리에게 낯설다. 정전의 긴 수평선은 종묘의 숭고미를 대표한다.
사실 정전 건물 자체만 보면 목조건물 치고는 긴 규모라는 점 외 이렇다 할 감흥은 없다. 정전은 1395년 7간에서 시작해 1546년(명종원년) 4간이 추가돼 11간 그리고 임진왜란 직후 재건을 거쳤다. 이후 1726년(영조2)에 4간, 1836년(헌종2)에 4간을 증축해 현재 감실 19간에 총 48위가 모셔져 있다. 정전은 그 규모가 몇 간이라 하더라도 완성된 건축이어야 했고 동시에 언제라도 증축을 고려해야 하는 유연한 건축이어야 했다.
2012년 9월 프랭크 게리Frank Gehry는 종묘를 다시 보고 싶어 한국에 왔다며, 공식 관람 전에 혼자 관람을 했다(동아일보, 2012.9.5). 게리는 "이처럼 장엄한 공간은 어디서도 찾기 힘들다며 비슷한 느낌을 주는 건축은 파르테논Parthenon 신전 정도뿐일 것"이라고 평했다. 짧은 식견으로 그의 평을 평하자면 종묘는 파르테논 신전이 아테네에서 누리는 시각적으로 압도적인 지위를 서울에서 누리고 있지 않다. 그래서 최소한 종묘는 파르테논 신전에서 느껴지는 교조적인 느낌이 없다.
게리가 종묘를 혼자 관람하고 싶다고 한 건 정전의 웅장함을 혼자 맞닥뜨리고 싶었기 때문이 아니라 그 앞 월대의 빈 공간에 혼자 서 있고 싶었기 때문일 것 같다. 그 순간이 오로지 절대 공간을 혼자 맞는, 온 우주를 대면하는 벅찬 순간임을 게리는 알고 있었다. 아마도 그 30분의 시간 동안 그는 아무말도 하지 않았을 것 같다. 난 조선의 왕들도 그 시간을 갖고 싶었을 거라 상상한다. 어쩌면 종묘의 정전과 월대는 산 자들이 죽은 자들을 위해 마련한 공간이지만 오히려 산 자가 차안此岸에서 얻지 못하는 무언가를 죽은 자가 있는 피안彼岸의 세계에서 살짝 들여다보기 위해 만든 공간이라고 생각한다.
해설사의 닦달에 이끌려 정전 영역을 나와 영녕전 동문으로 들어갔다. 영녕전은 세종3년에 처음 건립됐다(위 사진). 이후 1608년(광해군 즉위년)에 10간 규모로 재건한 뒤 1667년(현종8)에 좌우 협실 각 1간, 1836년(헌종2)에 다시 각 2간을 증축했다. 현재 정면 16간에 32위가 모셔져 있다. 영녕전의 구성은 정전과 거의 같지만 살짝 올라간 지붕의 길이가 정전에 비해 훨씬 짧다. 정전의 경우 좌우 협실 부분만 지붕이 낮지만 영녕전은 가운데 4간의 지붕만 높다. 많은 사람들이 정전 영역에 대해서는 다양한 생각과 감상을 설파하지만 영녕전 영역에 대해서는 별 말이 없다. 아마도 한눈에 볼 수 있는 영역의 크기가 인간계를 넘는 경외감을 주지 못하기 때문인 것 같다.
종묘를 관람하기 위해서는 문화재해설사의 안내를 따라야 한다. 자유관람은 매주 토요일과 매월 마지막 주 수요일(문화가 있는 날)만 가능하다. 종묘라면 당연히 그래야 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문화재해설사의 설명이 종묘라는 공간의 몰입감을 떨어뜨린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루 몇 회 정도는 문화재해설사가 안내만 하고 설명은 하지 않는 '침묵의 해설 시간'을 마련해 보는 건 어떨까? 종묘에 대한 정보를 듣기 위함이 아닌 내 안의 목소리를 듣기 위한 관람시간이 마련되면 종묘를 더 실감할 수 있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