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osted on 2020.08.07
- 경험하는 집
- 건축가의 단독주택 라이프
늦잠을 자도 크게 상관없는 일요일 아침이다. 에어컨을 안 켜도 선선한 아침이니 오히려 늦잠을 권장할 만한 날이기도 하다. 더욱이 아내마저 아침 일찍 외출했기에 혼자 아이들 보는 절대시간을 줄이려면 늦게… 아주 늦게 애들이 일어나는 게 여러모로 좋다. 혼자 여유롭게 소파에 누워 스마트폰을 돌려보는데 비 오는 소리가 제법 크게 들린다. 점점 크게, 더 크게. 이 신나는 소식을 알려줘야 할 것 같아 아이들 있는 방(이 아닌 놀이공간?)으로 가보니 리원이는 깨서 멍하니 앉아있고 시원이는 여전히 쿨쿨이다. 눈을 반만 뜨고 앉아있는 리원에게 물었다.
"비 오는 소리 들으러 나가볼까?"
자는 줄 알았던 시원이가 되려 대답한다. "그래". 그리고선 벌떡 기상. 나는 정신없는 리원이를 안고 시원이와 베란다로 나갔다. 장대비가 쏟아지고 있었다. 말소리가 잘 안 들릴 만큼 빗소리도 컸다. 마당 풀장 덮개에 비가 내리치면서 소리가 더욱 커지는 듯했다. 비는 우리 집 지붕과 베란다와 마당 자갈과 대나무에, 골목에 세워진 옆집 자동차와 아스팔트 바닥에도 시원하게 내리고 있었다. 옆집 옥상에서는 펼쳐놓은 햇빛 가리개를 치우느라 세 사람이 짙은 청색 우비를 뒤집어쓰고 분주히 움직이고 있었다. 개운산 절벽은 비에 젖어 더욱더 시커멓게 채도를 높여갔다. 아이들은 베란다 의자에 앉아 미지근한 보리차를 마셨다.
△ 겨울 아침이면 엄마가 늦잠 자는 내게 그랬다. "밖에 눈이 많이 왔다." 그러면 자동으로 눈이 번쩍. 남녘의 잔설은 오전을 넘기지 못한다.
얼마 전 오랜 주택 생활 끝에 난생처음 아파트로 이사 간 누나의 말이 떠올랐다.
"아파트에서는 비 오는 것도 모르겠더라."
'맞아, 누나 나도 그랬어.' 신혼집이었던 5층 아파트에서는 그나마 1층 놀이터에서 들려오는 아이들 뛰어노는 소리 덕분에 집 안에 있어도 바깥(타인, 사회, 자연?)과 연결된 느낌이었다. 이후 18층 아파트로 이사 오고 나서는 비나 눈이 오는 것은 물론이고 시간이 얼마나 어떻게 흐르는지도 잘 모를 정도였다. 물론 날씨를 살펴보고 시계를 들여다보면 다 알 수 있는 것들이지만, 의식으로 인지한다는 것과 감각이 먼저 알아차린다는 것은 다른 차원의 일처럼 느껴졌다. 그건 내가 세상(혹은 자연, 타인, 사회)에 존재한다는 것에 몸이 먼저 반응하는 일이었다. 18층이다 보니 번개 치는 것은 잘 보였다. 번쩍!.... 우루르쾅쾅. 땅보다는 하늘에 가깝구나 싶었다.
△ 방킬라이데크 위로 비가 쏟아진다. 얇게 고인 물에 떨어지며 빗소리를 낸다. 데크재가 원목이어서 걱정을 했는데 3년째 잘 버티고 있다.
얼마 전 아내와 아이들이 육식을 너무 많이 하는 것 같다는 얘기를 나눴다. 소나 닭, 돼지를 키우려면 얘네들이 먼저 식물을 먹어야 하는데, 그러지 말고 사람이 식물을 바로 먹으면 되지 않냐는 거였다. 그렇게 몇 마디만 나누고 마쳤던 대화였는데, 이후로 난 그 대화가 계속 머리에 맴돌았다. 왜 육식을 많이 하는 걸까? 채식주의자는 아니지만 이런 의문이 계속 들었던 탓이다. 그러고선 며칠 드문드문 생각해본 끝이 내린 나름의 결론은, 인간처럼 눈, 코, 입, 귀, 다리, 몸통이 있는 소나 돼지가 어떻게 태어나고 크는지 직접 본 적이 없기 때문일 수도 있겠다 싶었다. 잘 모르기에 다만 산업의 한 부분으로만 인식하게 되고, 자연히 교환가치로 의미가 있는 고깃덩어리로만 느껴지기 때문이 아닐까. 생명이 태어나고 자라며 죽는 일련의 시간을 경험하지 못한 무감각 속에 우리는 알게 모르게 점점 육식이 많아지는 거라고. 나고 자라고 죽는 자연의 흐름으로부터 너무 멀리 와버린 탓에, 비 오는 소리 조차 들을 수 없는 곳에서 살아가기 때문이라고 나는 생각했다.
△ 집에서 듣는 비 오는 소리
도시 속에서 자라는 우리 아이들은 더 모를 텐데.. 따라서 단독주택에 와서 가장 좋은 순간을 뽑자면 아이들이 비 오는 소리 듣자며 눈 비비고 일어나고, 달 보자며 엄마 아빠 손 붙잡고 베란다에 나가고, 심어놓은 꽃이 잘 자란다며 좋아하고 따로 통에 담아둔 굼벵이가 없어졌다며 탐정이 되어 굼벵이의 동선을 추적하는 자연의 흐름을 경험하게 되는 그 사소한 순간들이 아닐까.
그나저나 우후죽순이라는데, 2년 전 심은 대나무가 올해 들어 번성하기 시작했다. 이번 장마 지나면 과감히 정리를 좀 해야겠다. 잘라낸 대나무로 무엇을 만들까.. 아이들과 상의를 해봐야지.
소소건축사사무소 이원형
집과 글을 짓습니다. 몇몇 독자를 염두에 두며 쓰고 집주인의 라이프스타일을 고려해 설계하지만, 세상에 나오고부터는 집과 글 둘 다 모두의 공간, 텍스트가 된다고 여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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